“가위 주세요.”
집도의인 오남기 삼성서울병원 이식외과 교수가 말하자 그의 왼쪽에서 팔이 뻗어 나와 수술용 가위를 건넸다. 오 교수가 가위를 돌려주자 다시 받아 제자리에 놓았다. 오른쪽에선 또 다른 두 팔이 움직였다. 한 손은 복강경 내시경으로 수술 부위를 비추고, 다른 손은 집게로 조직을 잡아당겼다.대학병원 수술실에서 볼 법한 풍경. 하지만 오 교수와 합을 맞춘 건 전공의도, 간호사도 아니다. 푸른 수술복을 입은 휴머노이드 로봇 두 대다. 16일 오후 서울 삼성생명 일원역 빌딩 내 강의실에서 진행된 인간·로봇 연합팀의 ‘협주’는 10여분 만에 염소 간에 있는 담낭을 떼면서 성공적으로 끝났다.인간과 로봇이 한 팀이 돼 수술대 앞에 서는 날이 현실로 다가왔다. 17일 삼성서울병원은 “휴머노이드형 피지컬 인공지능(AI) 기반 수술보조 로봇 두 대가 인간 의사와 역할을 나눠 수술하는 장면을 세계 최초로 구현했다”고 밝혔다. ‘K로봇 외과의’가 상용화되면 필수의료 인력 부족을 메워줄 거란 기대도 나온다.이번 로봇 개발은 정부의 보건의료 연구개발 사업인 ‘한국형 ARPA-H 프로젝트’의 하나다. AI 수술로봇 개발을 둔 각국의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한국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걸 입증했다.“따라가.” 오 교수가 지시하자 로봇이 든 내시경 카메라가 수술 도구를 따라 움직였다. “많이 뒤로”라는 지시에 카메라가 물러나 시야를 넓혔다. 음성 지시 2초 안에 움직임이 따라왔다. 로봇이 수술 시야를 확보하고 조직을 잡아당기는 사이 오 교수는 담낭 절제를 이어갔다. 병원에 따르면 로봇은 수술 도구 5종에 대한 시험에서 집기 성공률 100%, 전달 성공률 98.7%를 보였다.글로벌 수술로봇 시장 규모는 지난해 약 18조원에서 2034년 67조원 규모로 급성장할 전망이다. 미국·중국이 앞서 나가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해 7월 미 존스홉킨스대 연구팀은 수술 로봇이 사람 개입 없이 돼지 사체의 담낭절제술을 8차례 수행했다고 밝혔다.한국이 주목하는 건 로봇의 단독 수술보다 인간과의 협업이다. 집도의는 판단과 술기에 집중하고, 로봇들이 보조 역할을 맡아 의사 한 명만으로 수술하는 ‘솔로 서저리(Solo-surgery)’를 구현한다는 구상이다. 연구 책임자인 정용기 삼성서울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한국엔 정교한 수술 역량을 갖춘 의료진, 로봇 개발 기업, AI 연구진이 모두 있어 유리한 여건이다. 수술로봇 개발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로봇공학자인 여준구 ‘K-문샷 AI 휴머노이드’ PD는 “미국 등이 자율 의료로봇 개발에 뛰어든 가운데, 한국이 의료진과 로봇의 협업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은 의미 있다”고 했다.미·중과 다른 길을 택한 데엔 ‘의료진 공백’도 깔려있다. 정규환 삼성서울병원 지능형의료로봇연구센터장은 “수술 인력이 없다는 현장의 의견을 반영해 시작된 연구”라고 털어놨다. 정용기 교수는 “인력이 부족한 지방 병원이나 야간·응급 상황에서 표준화된 수술 보조 서비스를 제공해 지역 간 의료 격차 해소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팀은 2029년 첫 임상시험을 목표로 적용 범위를 넓혀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