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제대를
불과 몇 달 앞두었을 때였다.
어느 날 면회를 온 그녀는 한참동안
망설이더니 갑자기 해외로 떠난다고 했다.
그것도 일주일 후에.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얘기야, 대체?"
"가족이 모두 이민가. 나도 따라갈 거야."
"가지마. 나를 두고 어떻게..."
"가야해."
"안 돼! 부탁이야!"
"여기 있으면 뭐 할 건데. 전부 이민 가는데
나 혼자 남을 순 없잖아."
"....."
그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랑 결혼해, 나랑 같이 살아.
하지만 나는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직 제대가 몇 달이나 남아있었고,
대학을 2년 반을 더 다녀야 했다.
그 후 취직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전산과이기는 해도 기업체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지방캠퍼스인데다가
1학년 때 성적은 바닥권 이였다.
영어 실력도 빵점이였다.
그것을 보충할 다른 뾰족한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도 말이 없었다. 이렇게 이별하는 건가?
안되는데...
안 되 는 데.........
나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연락처라도 남겨줘. 제대하면 날마다 전화할게."
"..................아냐, 안 해도 돼"
"왜? 왜 안 된다는 거야? 그럼 편지는?
주소라도 가르쳐줘."
"편지는 하지 마."
"헤어지자는 거구나. 내가 싫어졌니?
다른 남자친구 생긴 거야?"
"그건 아냐."
그녀는 말을 딱 잘랐다.
슬픈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유난히 핏기가 없었다.
고민을 많이 했는지 몸도 무척 야위어 있었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른 남자 생긴 거, 절대 아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종화, 너 밖에 없어.
하지만 자세한 것은 묻지 말아줘. 부탁이야."
"그런데, 왜 전화조차 안 된다는 거야?"
나의 목소리는 다시 높아졌다.
그녀는 힘없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순간 그녀의 머리칼이 꽂힌
자그만 꽃머리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첫 휴가를 나갔을 때 같이
거리를 거닐다가 샀던 거였다.
그녀가 입고 온 옷도 그날 내가 선물했던 거였다.
"가지마. 제발 가지마.
가더라도 조금 있다가 돌아와줘."
"날 정말 사랑한다면 내가
돌아올 때 까지 기다려 줄 수 있어?"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나도 눈물이 치솟으려 했다.
"그래, 언제까지라도. 네가 돌아만 와 준다면."
나는 굳게 말했다.
"그렇다면 좋아."
그녀는 뜻밖에도 품에서
빨간색 3.5인치 디스켓을 한 장 꺼냈다.
그리고 내 손에 꼬옥 쥐어주었다.
"여기 우리가 다시 만날 시간과 장소가 적혀있어.
나는 3년 뒤에 잠깐 귀국할 거야.
그때 이곳으로 찾아와줘,
그러면 너랑 결혼하겠어."
"정말이야?"
나는 너무 기뻐 환성을 지를 뻔 했다.
결혼이라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이 말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어."
"뭔데?"
나는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물었다.
"거기 내가 부탁한 것이 몇 가지 적혀있어.
꼭 그대로 해줘야 해. 알았지?"
"그래. 알았어."
"그럼 잘 있어. 나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주현아, 꼭 돌아와줘. 그때 만나! 널 사랑해!"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 앞에서 사라져 갔다.
그녀가 종이가 아니라 디스켓에
만남의 장소를 남겨둔것이 이상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그보다 나는 오직 그 곳이
어디냐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일까?
아니면 첫 키스를 나누었던 곳일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몇 달
남은 군대 생활을 무사히 마쳤다.
컴퓨터라고는 286도 볼 수 없었던
말단 소총부대에 있었던 나는 제대할 때까지
디스켓을 열어보지 못했다.
오직 관물대 속에 소중히 넣어두고
행여나 깨질세라 조심스럽게 간직했다.
그리고 제대하기가 무섭게 나는 제일
먼저 집으로 뛰어 들어와 군복도 벗지 않고
컴퓨터부터 켰다.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녀가 준
빨간 디스켓을 드라이브에 집어넣었다.
뜻밖의 파일은 두개가 들어있었다.
일단 둘 다 하드에 카피했고 곧장
아래아 한글 2.0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내게 준 파일명은
FIRST.HWP와 SJHR.HWP였다.
나는 FIRST.HWP를 먼저 불러들였다.
아뿔싸! 파일은 3.0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나는 시대가 바뀌었음을 실감하면서
부리나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축하주를 사준다는 놈들을 마다하고
3.0버전을 갖고는 녀석을 수소문해서
부리나케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와 인사를 대강 나눈 후
곧장 컴퓨터에 디스켓을 넣은 후
그 파일을 불렀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사랑하는 종화에게.
미안해.
나를 만날 장소는 다음 파일에 적혀있어.
거기엔 암호가 걸려있는데
넌 그것을 풀어야만 나를 만날 수 있어.
암호는 영어 소문자로 입력되어 있어.
앞의 세글자는 내 이름의 약자 pjh이고
그 다음에 영어 단어 하나가 있어.
아마 지금 이 글을 보는 너는 무척 실망하고 있겠지.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건 반드시
너 스스로 풀어야만 해.
나는 네가 풀수 있다고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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